사실(史實)에 관한 주관적인 잡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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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萬春(양만춘)이라는 이름, 신빙성 있다(1)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안시성.
이 때문에 다시금 안시성 싸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기가 대단해졌다.
다들 안시성 싸움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당나라의 태종은
군대를 몰아 파죽지세로
고구려 국경에 있는 성들을
깨뜨리며 평양으로 진격해온다.
그러나 중간에 방해가 될것으로 생각되는
자그만 성 안시성을 확실히 짓밟고자
그리로 군대를 돌린다.
그러나 예상 외의 고전을 치르며
결국 계획했던 고구려 정벌마저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던 싸움.
그러나 이것은 침략군 당의 입장에서 본
측면일 뿐이다. 전쟁의 준비, 시작부터
작전, 공격방식까지 자세히 남아있는
당군과 달리 고구려측은 당나라 사서에
의해 기록된 몇 줄과 그걸 얼기설기
배열해 그나마 보기 좋게 해놓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우리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 대해,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양만춘 아닙니까?"
라며 당당하게 맞받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사학계에서 내놓는 답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며,
양만춘이란 성명은 후대의 작명일 뿐
당시 인명이 아니다."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국사교과서에서
양만춘이라는 인명을 본적이 없는것 같다.
그렇다면 왜 현재 학계는 양만춘이라는
이 인명이 史實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그 출처가 소설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기록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임진왜란 연간에 기록된
윤근수의 <월정만필>인데, 그 내용을 보면,
"안시성주가 당 태종의 정예 군대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그 공적이 위대하다. 그런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역사서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수로 우리나라에 원병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이다. '당태종동정기(東征記)'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았더니 안시성주는 양만춘이었으며, 또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두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라며 양만춘의 이름을 처음 전하였다.
여기서 당태종동정기와 당서연의는 모두 같은 책을 일컫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것은 바로 명나라 웅종곡(熊鍾谷)의 소설인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儀)>이다. 이 책은 명 대에 유행하였던, 삼국지연의 같은 백화문 소설으로,
당태종의 일대기를 소설로 각색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당태종과 안시성주의 대결이 실려있고, 이 마지막 부분만을 따로 동정기(東征記)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만춘이란 이름이 언급된 책들 중
동춘당선생별집, 동사강목 등이
이를 인용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출처가 소설이므로 믿기 어렵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그 인명이 고구려 당시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서지전통속연의(이후 당서지전)>에는 양만춘 말고도 안시성을 지키는 5인의 장수의 인명이 나오는데,
각각 절노부 소속 추정국(鄒定國), 이좌승(李左升), 관노부 주수 구비(毆飛), 그 아래의 기무(曁武), 장후손(張猴孫)이다.
또한 건안성을 지키는 형제 장수 노한이(盧漢二), 노한삼(盧漢三), 술법사 속정한(束頂漢) 등등...
당서지전에는 고구려의 장수로 총 30여명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모두 고구려식이 아니라 한식(漢式)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추, 이, 장, 구 등의 성씨가 삼국사기 등 정식 사서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만약 있었던 성씨라고 해도
씨족 중심 사회인 고구려에서 한미한 집안이 성주의 직책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등의
문제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사학계는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일각에서는 이렇게 출처도 불분명한
이름을 대외적인 국방에 사용할 잠수함에 붙였다고(양만춘호)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셋째로, 양만춘과 구비 등 고구려 장수들의 소속이라고 
밝히는 절노부, 관노부 등의 부명이 전쟁 당시인
645년에 이미 사라진 지명이라는 것이다.
절노부, 관노부 등은 고구려가 세워질 때부터 그곳에 존재해 온
5개의 부족집단이었는데, 각각 순노부(환나부), 소노부(비류부),
관노부(관나부), 절노부(연나부),계루부이다.
그런데 고국천왕 대에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원래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4부는 왕실(계루부)을 중심으로 합쳐져
단지 행정적으로만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남게 된다.
고국천왕은 4세기 중후반에 재위했다. 그런데 전쟁이 난 7세기까지
이 부명이 남아있었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 양만춘이라는 성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불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사학계가 제시하는 첫번째 근거,
그 출처가 소설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백화문이란 중국어의 구어체로서, 
항간에서 말해지는 구어체의 중국어를
한자로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을 말한다.
또한 조선 후기 홍희복은 청나라의 소설<경화연>을 번역한
<제일기언>서문에서,
 “소설은 처음에는 사기(史記)에 빠진 말과 초야에 전하는 일을 거두어 모아내어 야사(野史)라고 하였다. 그 뒤에 문장력은 있으나 일없는 선비가 필묵을 희롱하고 문자를 허비하여 헛말을 늘여내고 거짓 일을 사실처럼 하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사실처럼 믿게 하고 매료시켜 소설이 성행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집중할 것은 빨간색으로 쳐진 문장이다.
삼국지연의, 초한지 등등에서 보이듯, 동아시아에서의 소설은
상당수가 정사(正史)에 야사(野史)나 구전(口傳)을 보태어 재미있게 엮은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삼국지연의 등의 속에서 유비, 관우, 장비, 조조, 헌제, 하후돈 등 
실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행적이나 언행들은 조금씩 바뀌었고
주창(周倉) 등 가공인물들이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 기본적인 역사의 얼개와 흐름은
기본적으로 정사와 같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당서지전 또한 비슷하게 지어졌을 거라고 생각된다.
당서지전 또한 삼국지연의나 초한지처럼 실제 사실(史實)에 배경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둘째 근거에 대해서는, 먼저 홍호의 <송막기문>의 발해국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나라의 임금은 옛날부터 대씨()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로는 고()·장()·양()·두()·오()·이()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발해 귀족들의 성씨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발해의 주요 성씨로 고씨, 장씨, 양씨, 두씨(竇는 賀의 오기), 오씨, 이씨가 언급된다.
다음으로 892년 편찬된 일본의 사서<유취국사>의 기록을 보자.
"그 나라는 2000리에 걸쳐 있다. 주현(州縣)과 관역(館驛)이 없고 곳곳에 촌락이 있는데 
모두 말갈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은데,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
여기서 토인(土人)이란, 원래 그 땅의 사람, 다시 말해 고구려인을 말한다. 
이 기사는 발해의 지방통치제도에 관한 부분인데, 이 기사를 통해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송막기문과 유취국사의 내용을 조합해 보았을 때, 발해의 귀족들, 즉
고씨, 장씨, 양씨, 두씨, 오씨, 이씨는 모두, 혹은 대개 고구려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당서지전의 기록을 보자. 여기서 등장하는 성씨는 양(梁), 추(鄒), 이(李), 구(毆), 기(曁), 장(張)의 
6성이다. 이 중 이씨와 장씨가 고구려의 성으로 기록되어있다. 또한 추씨의 경우에도 대무신왕 재위기간 중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역임한 추발소(鄒發素)가 나타나며, 추모왕(鄒牟王),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의 朱(주) 등등 성씨와 인명 등에 이용된 추 계열의 발음이 고구려에서 많이 나타난다. 더군다나 이씨의 경우는, 고구려 유민으로써 제남의 왕이었던 이정기(李正己) 일족, 고구려의 사관이자 익산 이씨의 시조인 이문진(李文眞) 등 확인되는 예시가 많다.
그리고 구(毆)씨, 기(曁)씨 등의 성씨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 성씨이다. 또한 노씨의 경우를 보자.
우리나라 노(盧)씨의 시작은 중국 유주(幽州) 범양(范陽)출신인 당나라의 한림학사 노수(盧穗)라고 한다.
그는 당시 당나라가 혼란하자, 아들 9형제를 이끌고 통일신라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들 9형제가 각각 번창하여 우리나라 노씨의 근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다.
노수가 아홉 아들을 이끌고 귀순하여 정착했다는 곳이 평북 정주, 그 이후 이거하여 평남 용강이었다는 것이다.
노씨 족보에 의하면 이들은 통일 신라에 귀순하였다고는 하나, 정주와 용강은 모두 대동강 이북이다.
즉 대동강 이남만 다스렸던 통일신라에 귀순하였다는 것 자체와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
당시 대동강 이북은 발해가 다스리고 있었고, 대동강 이남은 통일신라의 세력권이었다.
그러므로 말로는 통일 신라에 귀부하였다 하나 실제로는 발해 영토에 정착한 것이다.
게다가 노수의 출신지라 전하는 유주 범양은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사면된 영주(營州)와 매우 가깝다.
또한 유주는 노(盧)씨의 본고장인 산동(山東)에서 훨씬 떨어진 곳이다. 즉 노수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사민된
곳에 살다가 발해의 영토로 귀순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노씨 또한 고구려 계통일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한이, 노한삼과 같은 인명이 마냥 현실성이 없는 건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만일 웅종곡이 한풍(漢風)으로 적당히 작명하여 출판할 생각이었다면, 
중국인들에게 더 익숙한 왕(王), 유(劉) 등의 성씨를 쓰지 않았을까...한다.

셋째, 과연 4세기에 고쳐진 부(部)의 이름이 7세기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가? 
확실히, 4세기에 개칭된 이름이 300년 뒤까지 전수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이 고구려 5부의 이름, 순노부, 소노부 등은 모두 그 부족이 연고로 두었던
땅에서 유래한 것이란 것이다.
고구려의 5부는 압록강 중상류에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노부의 다른 이름인 비류부는 압록강의 다른 이름인
비류수(沸流水)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른 부명들에서 보이는 나(那-奴)의 뜻은
현대국어로 '내', 즉 '강'을 나타내는 의미인 것이다. 
즉 이 5부는 압록강 호안을 따라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부들의 이름 또한 땅의 이름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자. 
지명은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을까?
대표적으로 서울을 들 수 있다.
모두 잘 알다시피 서울이란 말은 신라의 수도인
서나벌(徐那伐)에서 나왔다. [shurbur] 정도로 발음되었던
서울은 한산주, 한양, 한성, 남경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결국은 신라의 수도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도읍이라는 의미 자체로
쓰이게 된 고유어 서나벌에 밀리게 된 것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고려에 의해 500년 간 남경으로, 조선에 의해 다시 500년 간
한성으로 불려왔음에도 1000년을 버틴 것이다.
이는 그곳의 지명이 바뀌었음에도 상호나 그 지역의 여러 장소에
옛 지명이 남아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공주(公州)시의 이름의 변천 등 그 예시가 수도 없다.
지명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비록 중앙에서는 각 부 가(加)들의 권력을 빼앗고 부들을 행정구역화 하였으나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졌던 지명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 부의 명칭이 각각 동,서,남,북,중으로 개편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수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고구려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개로 나누었다. 즉 수도에도 순노부, 절노부, 소노부, 연노부, 계루부가 있었고 지방에도 순노부, 절노부, 소노부, 연노부, 계루부가 있었던 것이다. 고국천왕이 중앙집권화를 위해 5부를 동서남북중의 방위명으로 고쳤지만, 그것은 수도에만 한정됐던 것이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각각의 부의 세력이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원래 이 5부가 터잡고 살던 땅들은 뭐라 불렸을까? 아마 원래대로 소노부, 절노부 등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비록 중앙에서는 그렇게 기록은 안했지만, 입말로는 그렇게 불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이미 명칭이 동부, 서부 등으로 바뀌었었다고 하더라도

웅종곡이 소설을 쓰면서 이미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을 통해 
중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관노부, 절노부 등의 이름을 소급해서
적용시켰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 필자의 견해가 더 남아있지만, 그것은 다음 글에 써보기로 하고, 이번회차는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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