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왕망(王莽)이란 인물을 아는가?
왕망은 전한 말기의 외척으로, 전한 평제(平帝)의 장인이자, 마지막 황제인 자영(子嬰)을 어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라 신(新)왕조를 세운, 중국 최대의 역적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유자(儒者)였던 그는 한나라 조정과 실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변방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그들 지도자의 격을 왕(王)에서 제후(侯)로 떨어뜨리며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섬기고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전까지 한 조정은 고조(高祖) 때 겪은 백등산 전투 이후로 유목민족들에게 막대한 세폐를 바치고, 그 대신 유목민족들은 한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대접하는 나름의 실리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망은 즉위하자마자 이러한 관계를 파기해 버리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섬기라고 하였으니, 유목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신(新)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 즈음 들어 고구려와 신나라와의 충돌이 잦게 되고, 드디어 크게 한 판 벌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기원후 12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사이다.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31년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흉노,匈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 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이 기사의 핵심은, 한나라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군사를 보내라고 고구려에게 요구했으나 고구려 측에서 불응하였고, 이에 서로 감정이 상한 두 나라가 격돌한 것이 바로 A.D.12년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한서> [왕망전]의 기록을 보자.
"왕망(王莽)의 처음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 추(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딱 봐도 알겠지만, 삼국사기와 한서의 기록이 십중팔구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김부식이 이 기사를 쓸 때에 한서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수 연비의 목을 벴다고 쓰여있지만, 한서에는 구려후 추라는 인물의 목을 베 장안으로 보냈다고 쓰여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맞는 걸까? 유학자에다 백제 시조설화도 세 종류나 싣는 등 치밀함을 보여준 김부식이 떠도는 말이나 자기가 지어낸 생각을 기록에 덛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항간에 떠도는 말을 모았다하더라도 김알지의 시림전설처럼 민간에서 떠돌던 전설임을 명기했을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고구려측의 원사료를 접하고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한서의 대립은 고구려측의 史觀과 한나라측의 史觀의 대립으로 볼 수 있겠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한서의 기록에 좀 더 신뢰를 보내는 것 같다. 김부식이 고구려측 사료를 보고 기록한 만큼, 고구려에 있어 치욕스러웠던 그들 왕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숨겼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리고 구려후 추는 기원후 12년 당시 왕이었던 유리명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고구려에서 왕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여 숨겼을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체가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도굴된 사건,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 또한 감추지 않고 서술했다. 그리고 왕이 죽었다면 그 뒤에 엄청난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거나, 혹은 선왕의 죽음에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신 왕조와의 큰 전투가 또 한번 일어났을 수도 있었는데, A.D.12년의 이 사건 이후에 그런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사건 자체를 지워버린다고 해도, 그 이후 인물들의 행적, 혹은 이후의 정국 등을 보면 대강 유추가 가능하다. 이렇게 큰 전투에서 왕의 목이 달아났다면 그 이후의 엄청난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 사건 자체를 지운대도 그 흔적들을 모두 지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것은, 적어도 전투에서 왕이 사망한 큰 사건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학계에서 한서의 기록을 지지하는 또다른 이유는, <위서(魏書)>의 기록 때문이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立 乃并夫餘.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회임하였다. 주몽이 도망간 후 아들 하나를 낳았고, 자(字)는 처음에 여해(閭諧)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라는 것을 알자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왔다.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였고 국사를 위임받았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었다.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대를 이었다.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일어나니 이에 부여를 아울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그 후손이 궁에 이르렀다." 주몽은 초대임금 동명성왕, 여달은 위 기사에 나타난 행적과 고대 한자발음의 재구음을 보았을 때 2대 유리명왕(類利[ruds rids] 閭達[ru dad]), 막래는 글자의 유사성, 혹은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5대 모본왕(莫來, 慕本) 혹은 3대 대무신왕(武神[*ma-Cə.li[n]]莫來[*mak(a)rək]으로 본다. 또한 궁은 6대 태조대왕의 본명이다. 그렇다면 여율(如栗)은 누구인가? 한서의 설을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원후 12년 신나라와의 전투에서 실은 유리명왕이 사망했고, 그 이후 6년은 실제로는 그의 아들이라 기록된 여율이 다스렸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고구려 왕실의 가계도를 보자.
1.동명성왕
|
2.유리명왕
|------ㄱ---------ㄱ
3.대무신왕 4. 민중왕 재사
| |
5. 모본왕 6.태조대왕
막래를 모본왕으로 볼 경우 <위서>는 동생 민중왕을 누락시키고 대무신왕을 여율로 본 것이 된다.
얼핏 보면 중국에 고구려의 왕통에 관해 세세히 알려졌을 리는 없고, 왕위의 형제 계승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인이니 동생인 민중왕을 누락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대무신왕의 휘인 무휼(無恤)이 여율(如栗)과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기사에 부여가 복속되었다라고 했는데, 부여와 전쟁을 한 기록은 모본왕 대엔 없고 대무신왕 시기에만 있다. 그래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자는 견해가 대두되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이 부자관계가 아니라 조손관계가 되고, 대무신왕의 아버지는 여율이 된다. 그렇다면 여율은 누구일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유리명왕의 아들들을 보면, 장남이 도절태자(都切太子), 차남이 해명태자(解明太子), 삼남이 대무신왕(大武神王), 사남이 민중왕(閔中王), 오남이 고재사(高再思), 육남이 고여진(高如津)이다. 여기서 如栗과 가장 유사한 이름의 인물은 육남 고여진이다. 또한 고대 한국의 인명이 한자의 발음을 빌려오는 방식으로 적혔기 때문에 여율의 인명이 栗과 발음이 같은 律로도 적혔고, 如律을 <위서>는 발음을 음차하여 如栗로 적고 삼국사기는 律을 津으로 잘못 보아 여진으로 적었을 거란 추측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도 간접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여율이 유리명왕의 육남 여진이라고 해도, 위의 <위서>의 기록처럼 왕이 잠정적 후계자로 생각하는 아들에게 국사를 돌보게 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주몽이 유리에게 그랬고, 훗날 영조 또한 사도세자에게 그랬다.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의미심장한 기사가 있는데, 바로 유리명왕 37년 4월의 기사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때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되어있다. 유리명왕은 비통해 하며 여진의 시체라도 찾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얼마후 비류인(沸流人) 제수(祭須)라는 자가 여진의 시체를 찾아오자 그에게 금 십 근과 밭 십 경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리명왕은 이 사건 이후 6개월만에 죽게 되는데, 막내아들을 잃은 상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좀 특이한 기록인데, 유리명왕은 자식에게 인자한 아비가 아니었다.
둘째 해명태자와 계속 갈등하다 결국 죽이라고 명했고, 첫째 도절태자 또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는 않으나 갑자기 죽은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 모종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유독 막내 여진만은 죽었을 때 비통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의 시체를 찾아온 인물에게 포상을 하고, 결국 얼마 못 가 죽었다는 이러한 일련의 기록들이 있다.
아마 유리명왕은 잠정적으로 여진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던 것이 아닐까? 비록 형제 중 제일 어렸지만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질을 여진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차기 국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정사(政事)의 일정 부분을 맡겼을 것이고, 그때 당시 이미 노쇠한 유리명왕이었으니 수렴청정 비슷하게 자신은 뒤로 빠지고 아들 여진을 앞세우는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중국 측에서 잘못 받아들여 유리명왕이 죽고 아들 여진이 대를 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한 반론이 있는데, 구려후 추의 이름이 유리명왕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리명왕의 휘는 類利(유리) 혹은 孺留(유류). 그런데 구려후라는 자의 이름은 騶(추)이다.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역대 고구려 왕 중에서 騶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왕은 딱 하나다. 바로 동명성왕 추모(鄒牟)이다.
상고한어의 재구음을 보더라도, 騶는 [tʃǐɔ], 鄒는 [tʃǐɔ]로 완벽히 일치함을 보인다.(재구음은 왕리(王力)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동명성왕의 재위기간은 B.C.37~B.C.19이다.
즉 위의 사건이 일어난 A.D.12년과는 무려 30여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명성왕이 승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아직 그 소식이 중국에까지 전해지지 않아 그렇게 기록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이때는 이미 유리명왕 31년이었다. 중국이 아무리 화이사관에 젖어 다른 민족들에 무관심했더라도, 30년이 넘도록 코앞의 이웃국가가 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단순이 뻥을 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중국 정사 24史중 하나인 <한서>에 아예 거짓인 사실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비록 과장은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구려후 추의 騶가 인명이 아니라 고추가(古鄒加)의 鄒와 같은 말임을 주장한다.
고추가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5부(五部) 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대가(大加), 전왕족인 소노부의 적통대인(嫡統大人: 부족장), 왕비족인 절노부의 대가를 칭하는 말이었다.
위에서 보듯 고추가는 초기에 왕과 유력 귀족들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여기서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한나라의 장수 엄우가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의 목을 베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망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만약 이 연비라는 인물이 일개 선봉장이었다면 엄우가 거짓 보고를 하지 않고서야 왕망이 이렇게 기뻐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엄우가 감히 황제에게 거짓보고를 올리지는 못했을 것임으로, 연비는 고구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그러면 엄우가 연비를 왕으로 착각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또한 연비가 그냥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 내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성씨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성씨가 延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이 延씨의 출자를 보면, 주몽의 비(妃)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버지이자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延陀勃)이 나온다. 그러므로 연비는 이 연타발의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5부 중 계루부는 주몽과 그의 추종세력, 그리고 졸본의 토착세력이 합쳐져 이루어진 세력이므로 연비 역시 고추가의 칭호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한서>는 고추가 연비(古鄒加 延丕)의 고추가를 인명으로 착각해 구려후 추로 기록한 것이다.
왕망은 전한 말기의 외척으로, 전한 평제(平帝)의 장인이자, 마지막 황제인 자영(子嬰)을 어좌에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라 신(新)왕조를 세운, 중국 최대의 역적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유자(儒者)였던 그는 한나라 조정과 실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변방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그들 지도자의 격을 왕(王)에서 제후(侯)로 떨어뜨리며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섬기고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전까지 한 조정은 고조(高祖) 때 겪은 백등산 전투 이후로 유목민족들에게 막대한 세폐를 바치고, 그 대신 유목민족들은 한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대접하는 나름의 실리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망은 즉위하자마자 이러한 관계를 파기해 버리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섬기라고 하였으니, 유목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신(新)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이 즈음 들어 고구려와 신나라와의 충돌이 잦게 되고, 드디어 크게 한 판 벌이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기원후 12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사이다.
"三十一年漢, 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校勘."
"31년 한의 왕망(王莽) 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흉노,匈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고,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그들에게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부여의 족속 중에 따르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 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이 기사의 핵심은, 한나라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는데 필요한 군사를 보내라고 고구려에게 요구했으나 고구려 측에서 불응하였고, 이에 서로 감정이 상한 두 나라가 격돌한 것이 바로 A.D.12년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한서> [왕망전]의 기록을 보자.
"왕망(王莽)의 처음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 추(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딱 봐도 알겠지만, 삼국사기와 한서의 기록이 십중팔구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김부식이 이 기사를 쓸 때에 한서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수 연비의 목을 벴다고 쓰여있지만, 한서에는 구려후 추라는 인물의 목을 베 장안으로 보냈다고 쓰여있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맞는 걸까? 유학자에다 백제 시조설화도 세 종류나 싣는 등 치밀함을 보여준 김부식이 떠도는 말이나 자기가 지어낸 생각을 기록에 덛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항간에 떠도는 말을 모았다하더라도 김알지의 시림전설처럼 민간에서 떠돌던 전설임을 명기했을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고구려측의 원사료를 접하고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한서의 대립은 고구려측의 史觀과 한나라측의 史觀의 대립으로 볼 수 있겠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한서의 기록에 좀 더 신뢰를 보내는 것 같다. 김부식이 고구려측 사료를 보고 기록한 만큼, 고구려에 있어 치욕스러웠던 그들 왕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숨겼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리고 구려후 추는 기원후 12년 당시 왕이었던 유리명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고구려에서 왕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여 숨겼을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체가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도굴된 사건,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 또한 감추지 않고 서술했다. 그리고 왕이 죽었다면 그 뒤에 엄청난 정치적인 혼란이 있었거나, 혹은 선왕의 죽음에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신 왕조와의 큰 전투가 또 한번 일어났을 수도 있었는데, A.D.12년의 이 사건 이후에 그런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사건 자체를 지워버린다고 해도, 그 이후 인물들의 행적, 혹은 이후의 정국 등을 보면 대강 유추가 가능하다. 이렇게 큰 전투에서 왕의 목이 달아났다면 그 이후의 엄청난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 사건 자체를 지운대도 그 흔적들을 모두 지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것은, 적어도 전투에서 왕이 사망한 큰 사건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학계에서 한서의 기록을 지지하는 또다른 이유는, <위서(魏書)>의 기록 때문이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立 乃并夫餘. 莫來子孫相傳, 至裔孫宮."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처가 회임하였다. 주몽이 도망간 후 아들 하나를 낳았고, 자(字)는 처음에 여해(閭諧)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라는 것을 알자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왔다.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였고 국사를 위임받았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었다.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대를 이었다.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일어나니 이에 부여를 아울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그 후손이 궁에 이르렀다." 주몽은 초대임금 동명성왕, 여달은 위 기사에 나타난 행적과 고대 한자발음의 재구음을 보았을 때 2대 유리명왕(類利[ruds rids] 閭達[ru dad]), 막래는 글자의 유사성, 혹은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5대 모본왕(莫來, 慕本) 혹은 3대 대무신왕(武神[*ma-Cə.li[n]]莫來[*mak(a)rək]으로 본다. 또한 궁은 6대 태조대왕의 본명이다. 그렇다면 여율(如栗)은 누구인가? 한서의 설을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원후 12년 신나라와의 전투에서 실은 유리명왕이 사망했고, 그 이후 6년은 실제로는 그의 아들이라 기록된 여율이 다스렸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고구려 왕실의 가계도를 보자.
1.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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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리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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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무신왕 4. 민중왕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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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본왕 6.태조대왕
막래를 모본왕으로 볼 경우 <위서>는 동생 민중왕을 누락시키고 대무신왕을 여율로 본 것이 된다.
얼핏 보면 중국에 고구려의 왕통에 관해 세세히 알려졌을 리는 없고, 왕위의 형제 계승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인이니 동생인 민중왕을 누락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대무신왕의 휘인 무휼(無恤)이 여율(如栗)과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기사에 부여가 복속되었다라고 했는데, 부여와 전쟁을 한 기록은 모본왕 대엔 없고 대무신왕 시기에만 있다. 그래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자는 견해가 대두되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이 부자관계가 아니라 조손관계가 되고, 대무신왕의 아버지는 여율이 된다. 그렇다면 여율은 누구일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유리명왕의 아들들을 보면, 장남이 도절태자(都切太子), 차남이 해명태자(解明太子), 삼남이 대무신왕(大武神王), 사남이 민중왕(閔中王), 오남이 고재사(高再思), 육남이 고여진(高如津)이다. 여기서 如栗과 가장 유사한 이름의 인물은 육남 고여진이다. 또한 고대 한국의 인명이 한자의 발음을 빌려오는 방식으로 적혔기 때문에 여율의 인명이 栗과 발음이 같은 律로도 적혔고, 如律을 <위서>는 발음을 음차하여 如栗로 적고 삼국사기는 律을 津으로 잘못 보아 여진으로 적었을 거란 추측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도 간접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여율이 유리명왕의 육남 여진이라고 해도, 위의 <위서>의 기록처럼 왕이 잠정적 후계자로 생각하는 아들에게 국사를 돌보게 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주몽이 유리에게 그랬고, 훗날 영조 또한 사도세자에게 그랬다. 또한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의미심장한 기사가 있는데, 바로 유리명왕 37년 4월의 기사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때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되어있다. 유리명왕은 비통해 하며 여진의 시체라도 찾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얼마후 비류인(沸流人) 제수(祭須)라는 자가 여진의 시체를 찾아오자 그에게 금 십 근과 밭 십 경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리명왕은 이 사건 이후 6개월만에 죽게 되는데, 막내아들을 잃은 상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좀 특이한 기록인데, 유리명왕은 자식에게 인자한 아비가 아니었다.
둘째 해명태자와 계속 갈등하다 결국 죽이라고 명했고, 첫째 도절태자 또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는 않으나 갑자기 죽은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 모종의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유독 막내 여진만은 죽었을 때 비통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그의 시체를 찾아온 인물에게 포상을 하고, 결국 얼마 못 가 죽었다는 이러한 일련의 기록들이 있다.
아마 유리명왕은 잠정적으로 여진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던 것이 아닐까? 비록 형제 중 제일 어렸지만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질을 여진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차기 국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정사(政事)의 일정 부분을 맡겼을 것이고, 그때 당시 이미 노쇠한 유리명왕이었으니 수렴청정 비슷하게 자신은 뒤로 빠지고 아들 여진을 앞세우는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중국 측에서 잘못 받아들여 유리명왕이 죽고 아들 여진이 대를 이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한 반론이 있는데, 구려후 추의 이름이 유리명왕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리명왕의 휘는 類利(유리) 혹은 孺留(유류). 그런데 구려후라는 자의 이름은 騶(추)이다.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역대 고구려 왕 중에서 騶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왕은 딱 하나다. 바로 동명성왕 추모(鄒牟)이다.
상고한어의 재구음을 보더라도, 騶는 [tʃǐɔ], 鄒는 [tʃǐɔ]로 완벽히 일치함을 보인다.(재구음은 왕리(王力)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동명성왕의 재위기간은 B.C.37~B.C.19이다.
즉 위의 사건이 일어난 A.D.12년과는 무려 30여년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명성왕이 승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아직 그 소식이 중국에까지 전해지지 않아 그렇게 기록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이때는 이미 유리명왕 31년이었다. 중국이 아무리 화이사관에 젖어 다른 민족들에 무관심했더라도, 30년이 넘도록 코앞의 이웃국가가 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몰랐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단순이 뻥을 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중국 정사 24史중 하나인 <한서>에 아예 거짓인 사실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비록 과장은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구려후 추의 騶가 인명이 아니라 고추가(古鄒加)의 鄒와 같은 말임을 주장한다.
고추가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5부(五部) 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대가(大加), 전왕족인 소노부의 적통대인(嫡統大人: 부족장), 왕비족인 절노부의 대가를 칭하는 말이었다.
위에서 보듯 고추가는 초기에 왕과 유력 귀족들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여기서 다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한나라의 장수 엄우가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의 목을 베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왕망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만약 이 연비라는 인물이 일개 선봉장이었다면 엄우가 거짓 보고를 하지 않고서야 왕망이 이렇게 기뻐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엄우가 감히 황제에게 거짓보고를 올리지는 못했을 것임으로, 연비는 고구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그러면 엄우가 연비를 왕으로 착각했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또한 연비가 그냥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 내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성씨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성씨가 延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이 延씨의 출자를 보면, 주몽의 비(妃)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버지이자 졸본부여의 왕인 연타발(延陀勃)이 나온다. 그러므로 연비는 이 연타발의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5부 중 계루부는 주몽과 그의 추종세력, 그리고 졸본의 토착세력이 합쳐져 이루어진 세력이므로 연비 역시 고추가의 칭호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한서>는 고추가 연비(古鄒加 延丕)의 고추가를 인명으로 착각해 구려후 추로 기록한 것이다.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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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의 고구려후 추를 광개토왕릉비의 추모왕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http://qindex.info/i.php?x=1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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