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일찍이 신채호가 조선 5000년 역사에서 뛰어난 영걸 중 하나로 평가했으며, 그보다 더 이전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던, 한국의 역사에서 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행적은 살수대첩 시기의 것만 전해질 뿐, 그 이외의 것은 전해지지 않는데, 그의 출신 역시 미궁 속이다.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서 그의 출신과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에 대한 몇 가지 실마리가 있다.
첫째로,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침공의 사령관 중 하나였던 우중문에게 내린 밀명이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의 군대와 전투하던 도중 작전 상 거짓 항복을 하러 우중문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때 우중문에게는 양제의 밀명이 전달된 상태였는데, 그 내용인즉슨 고원(高元;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온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이 내려 온 것은 을지문덕이 그 이전부터 수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유명한 장군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둘째, 조선시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평양 평양부 태생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홍양호가 저술한 <해동명장전>에서는 그를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고 기록하며 아버지 없이 혼자 성장했다고 한다.
셋째, 을지문덕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목천 돈씨의 가승인 <돈씨가보>에는, 을지문덕의 원래 성(姓)은 을씨로, 을지문덕 대에 을지 씨로 개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 시기 을지수(乙支遂)가 동생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을 데리고 의병장으로서 싸움에 나서 묘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頓山)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져 돈씨로 개성하게 되었다 한다.
과연 이러한 자료들로 그의 출신을 점쳐 볼 수 있을까? 우선 첫번째 단서를 보자. 그가 중원에까지 알려진 장군이었다는 것은, 그가 살수대첩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도 활약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평균적으로 강감찬 등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선 전투에서 싸우려면 최대 40~50대 이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평균적으로 전투에 장군으로서 임하려면 최소 20대는 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수대첩이 있기 20~30년 전의 고구려-중국 전쟁은 무엇이 있었는가? 이 당시 중국과 고구려는 일대 긴장상태였으며, 그에 따라 크고 작은 갈등이 많이 일어났다. 그 중 큰 전투들을 뽑자면, 먼저 1차 여수전쟁(598)이 있으며, 배산전투(577)를 비롯한 평원왕~영양왕 초기 시기의 전쟁까지 포함될 것이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남북조시대로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북조와 고구려의 갈등 또한 자주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전투 또한 많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먼저 평원왕 시기의 전쟁들을 보자. 평원왕은 남조 진(陳)과 북조 북주(北周)의 대결을 계속 지켜보며 중국의 정세가 급변할 것을 대비해 국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아마 을지문덕도 이러한 과정에서 등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평원왕의 고구려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던 577년, 북주의 황제인 무제 우문옹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침공한다. 이것이 배산전투의 시작이다. 배산에서 북주군과 격돌한 고구려군은 우리가 잘 아는 온달장군의 지휘 아래 대승을 거두게 된다. 어쩌면 을지문덕은 배산전투에서 온달의 부관으로 참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북주가 수로 바뀌고, 수가 남쪽의 진을 공격해 통일하면서 평원왕은 더더욱 국경 방비를 튼튼히 하고 수나라의 무기장인들을 몰래 빼돌려 와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수 문제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평원왕이 죽고 양원왕이 즉위하자, 수 문제는 아예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고구려가 요서의 임유관을 먼저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임유관을 공격했던 목적은 임유관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침공 시 거점이 될 임유관을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수서>에는 임유관을 지키던 수나라 장수 위충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고는 하나, 위충은 고구려군의 본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쓴 고구려군을 보고 고구려군이 퇴각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출병을 조양(임유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탁군(지금의 베이징 일대) 쪽에서 한 것으로도 방증이 된다. 만일 임유관이 멀쩡했더라면 고구려와의 경계인 임유관에서 출병하는 것이 맞지, 수천 리나 떨어진 탁군에서 출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기에는 분명히 을지문덕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그는 평원왕 후기 즈음하여 등용된 듯하며, 그 당시 동북아가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그가 활약할 기회 또한 많아 저 멀리 중원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두번째 단서, 을지문덕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대신은 일반적으로 고관대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신당서>에서는 ,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
라고 설명하였다. 즉 대신이란 왕 다음가는 유력한 신하를 나타낸다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고구려는 뿌리깊은 부족 중심 국가였다. 건국 초기부터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의 다섯 부족의 연합이었으며, 고국천왕이 이 5부를 행정적으로 개편한 뒤에도 고(高)씨, 명림(明臨)씨, 연(淵)씨, 을(乙)씨 등 씨족과 부족 중심의 인사들이 많이 나타난다. 아무리 고구려가 말갈인 등 유목민족과 더불어 산 다민족 국가였지만, 왕 다음가는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집안 배경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단서는 세 번째 단서와도 관련되는데, 그가 을씨였든 혹은 다른 성씨였든, 그가 유력귀족가문의 자제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의 중앙귀족들은 주로 어디에 거주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성인 평양성 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의 기록은, 비록 후대에 쓰여진 것이긴 하나 신뢰가 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계가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마리가 있는데, 바로 그가 쓴 <여수장우중문시> 때문이다. 이 시는 한시 작법에 맞추어 정확히 지어졌는데, 당시 고구려 지배층에서도 이렇게 수준급으로 한문을 구사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옛날 평양지방의 낙랑군 출신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낙랑군의 중심은 평양이었고, 낙랑군이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된 것은 313년 미천왕 대의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낙랑군 출신의 신진 세력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을지문덕이 활동하는 시기는 낙랑군의 멸망보다 300년 가까이 지난 이후이다. 만약 을지문덕 가문이 낙랑군에 살던 중국계 서민 출신이었다면, 300년이 지나면서 토착 예맥세력에 동화되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낙랑군의 지배층이었다고 해도,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 을지문덕이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면 이미 고구려인들이 한문의 사용에 어색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한문을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해도, 이미 7세기 무렵에는 수 세기 동안 중국과 교류해 오면서 한문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토착 고구려인들 중에서도 한문을 유창히 구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평민이 그렇게 자유로이 한시를 지을 리는 만무할 것이므로, 그가 태학에서 공부한 귀족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학(儒學), 문학, 무예 등을 가르쳤으므로 태학의 졸업생들이라면 거리낌없이 한문을 구사했을 것이다. 평민 대상의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에서도 유교경전과 무예를 가르쳤으나, 만약 을지문덕이 평민 출신이었다면 대신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되기 때문에 그는 태학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고구려의 중앙귀족이었다는 것은 옳은 사실로 볼 수 있다. 혹은 <자치통감>에서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尉支文德)으로 기록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을지문덕이 선비족 울지부(尉遲部) 출신의 귀화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가 고구려의 대신이라고 기록된 점을 볼 때 상당히 지체높았던 인물로 보이는데도 그가 어느 부(部) 출신인지나 그의 출세의 과정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또 평원왕 시기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격인사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가 양광(양제)이 문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혼란 속에서 망명한 울지부 출신의 인물이 아니겠느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몇 가지 약점이 있는데, 우선 양제가 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것은 604년, 2차 여수전쟁이 일어난 때는 612년이다. 과연 8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순수 이방인이 고구려 사회 속에서 신뢰를 쌓아 최고 군통수권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심지어 울지부는 수나라에서도 아주 명망 높았던 귀족 가문이다. 아무리 선진국인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도 한창 수와의 분위기가 냉랭했던 시기에, 적국에서 넘어온 자에게 직접 군사를 다스리도록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출신 부를 명시하지 않았던 것 또한 당대에 그의 가문이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기에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대변되었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서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두 번째 단서와 깊게 관련돼 있는데, 그가 중앙귀족이었다는 것이 그의 성씨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자치통감>에서는 을지씨에 대해 '동이의 복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정식 사서에 있는 을지씨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을지씨의 한자를 통해 그의 성씨를 추정해 갈 수 있다. 乙支에서 乙이라는 글자는 삼국의 인명, 지명에서 우물을 뜻하는 단어이다.(예: 蘿井=奈乙, 伊干=乙粲) 그러므로 그가 귀화인이라는 추측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돈씨가보>와 평양 지방의 구전 전승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 돈씨가보에서는 을지씨의 본래 성이 고구려의 명문인 을씨라 했고, 평양 지방의 구전 역시 을지문덕의 조상이 진대법을 시행했던 명재상 을파소라고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되지 않는 점은, 을씨가 왜 을지문덕 대에 이르러 을지씨가 되었는가 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을지씨의 한자를 봐야 한다. 을지를 한자로 쓰면 乙支. 여기서 이 支는 고대 한국의 존칭 접미사로써, '臣智', '都設智', '武力智' 등등에 사용되었던 智, '波珍干岐', '旱岐' 등에서 나타나는 岐와 같은 의미인데, 모두 '치'로 발음되었다. 앞서 말했듯 대신의 지위에는 아무나 오를 수 없었다. 귀족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뛰어난 과업 수행 능력과 인망이 받쳐줘야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을씨는 고국천왕 대에 을파소가 국상이 된 후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을파소가 고국천왕 대의 사람이니, 을지문덕은 거의 300년 만에 을씨 가문을 다시 재상지종으로 만든,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자, 외국의 113만 침략군을 막아낸 구국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그의 성에 존칭접미사 支를 붙여 '을지'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시간이 지나며 아예 그것이 성씨로 굳어졌을 수도 있다. 즉 을지씨가 곧 을씨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설로는 을지가 성씨가 아니라, 음운상의 유사성을 들어 고구려의 제3관등인 울절(鬱折)의 다른표기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가설도 있다. 이것은 을지문덕이 대신이었다는 삼국사기의 서술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乙支와 鬱折이 당대에 얼마나 유사한 발음이었는가는 모르는 일이다. 또한 목천돈씨의 가승에 대해 일부는, 숭조사업으로 오염된 족보의 기록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더욱이 묘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던 을지수, 을지달, 을지원 삼형제의 이름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정식 사료에 남아있지 않아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에 대해, 고려 태조가 통일을 위해 후백제와 경쟁하던 시기,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태조에게 완강히 저항하여 이에 노한 태조가 그 지방을 복속시키고 그들의 본래 성인 尙, 于, 張, 頓 등의 성을 각각 象(코끼리), 牛(소), 獐(노루), 豚(돼지)로 개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돈씨의 연원이 문헌마다 다르게 기술된 까닭에 돈씨가보의 기록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역시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당대의 기록(조선시대에 편찬되긴 했으나 당대사료인 <고려실록>을 보고 편찬했으므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목천지방에서 그토록 완강했던 저항이 있었다면, 어째서 후백제군의 인물들 중 우씨나 장씨, 돈씨 등이 나타나지 않는가? 후백제 측 장수 중 상애(尙哀), 상달(尙疸) 등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우씨, 돈씨, 장씨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의 성들 중 목천 상씨문중 외에는 자신 가문의 내력에 대해 본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에 저항하다 동물을 의미하는 성(畜姓)으로 개성 당했다고 기록한 족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천 상씨 문중에서 최초로 펴낸 족보인 <목천상씨부여파보>는 1930년 간행된 것으로써, 오히려 상씨문중의 족보가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견해로는, 백제의 귀족가문이었던 목천 마씨가 한자로 馬를 썼기 때문에 생긴 민간전승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1934년 잡지 <별건곤>에 연재된 <을지문덕 묘 참배기>에는 을지문덕의 묘가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을지문덕의 묘가 있으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쓰여 있다. 또한 1935년 10월 1일~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준연의 답사기'에는 역시 을지문덕 묘의 위치를 평남 강서군 잉차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있다고 기록하며 돈씨 문중의 일원인 '돈종각(頓宗珏) 씨'도 만났다고 한다. 돈종각 씨는 본래 평남 대동군 대보면 대평외리에 살았는데, 자신의 조상인 을지문덕 장군의 묘가 평북 의주에 있다고 하여 가보니 그곳은 을파소의 무덤이었고, 을파소의 조부인 을두지의 묘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호에는 '조만식, 최윤옥, 김병연, 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하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평양시 평남선 대평역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지는 큰 고분이 있고,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고 하는 동네가 있어 돈씨 가문 사람들이 30~40여 호 살고 있다고 한다. 대평역과 대동군 대평외리는 바로 인접한 이웃동네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돈씨 가문이 자신들이 을지문덕의 후손이라 여기게 된 것은 최소 19세기 이전으로 보인다. 또 하나 <돈씨가보>의 신빙성을 높여 주는 것은, 돈씨 문중이 굳이 그들의 조상을 을씨라고 기록한 것이다. 돈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상계를 '을씨->을지씨->(돈산에 봉해짐)돈씨' 로 기록하고 있는데, 솔직히 직관적이지 않다. 보통 숭조사업은 자신들의 성과 비슷한 성을 가지고, 자기네 선조들과 행적이 비슷한 사람을 먼 조상으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김씨 왕실도 자신들의 선조를 소호금천(少昊金天),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로 끌어다 맞춘 사례가 있다. 그런데 돈씨의 경우는 한나라 때의 유명한 효자인 돈기(頓琦) 등이 있는데도 굳이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족보에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들이 <돈씨가보>의 기록을 한층 더 믿음직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론을 정리하자면,
1. 그는 평원왕 시기 대중국 국방의 강화로 등용되었다. 임유관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2. 그는 유력 가문 출신으로, 평양성 출신이다. 울절의 벼슬을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
3. 그는 토착 고구려계 을씨 가문 출신이며, 후손은 돈씨이다.
많은 사료들을 참고해 봐도, 을지문덕의 출신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한스럽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어 조금이나마 더 그의 출신을 짐작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일찍이 신채호가 조선 5000년 역사에서 뛰어난 영걸 중 하나로 평가했으며, 그보다 더 이전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서 그의 공을 높이 평가했던, 한국의 역사에서 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행적은 살수대첩 시기의 것만 전해질 뿐, 그 이외의 것은 전해지지 않는데, 그의 출신 역시 미궁 속이다.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서 그의 출신과 가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에 대한 몇 가지 실마리가 있다.
첫째로,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침공의 사령관 중 하나였던 우중문에게 내린 밀명이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의 군대와 전투하던 도중 작전 상 거짓 항복을 하러 우중문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때 우중문에게는 양제의 밀명이 전달된 상태였는데, 그 내용인즉슨 고원(高元;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수의 진영에 온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이 내려 온 것은 을지문덕이 그 이전부터 수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유명한 장군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둘째, 조선시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평양 평양부 태생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홍양호가 저술한 <해동명장전>에서는 그를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고 기록하며 아버지 없이 혼자 성장했다고 한다.
셋째, 을지문덕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목천 돈씨의 가승인 <돈씨가보>에는, 을지문덕의 원래 성(姓)은 을씨로, 을지문덕 대에 을지 씨로 개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 시기 을지수(乙支遂)가 동생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을 데리고 의병장으로서 싸움에 나서 묘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돈산(頓山)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져 돈씨로 개성하게 되었다 한다.
과연 이러한 자료들로 그의 출신을 점쳐 볼 수 있을까? 우선 첫번째 단서를 보자. 그가 중원에까지 알려진 장군이었다는 것은, 그가 살수대첩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도 활약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평균적으로 강감찬 등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선 전투에서 싸우려면 최대 40~50대 이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평균적으로 전투에 장군으로서 임하려면 최소 20대는 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수대첩이 있기 20~30년 전의 고구려-중국 전쟁은 무엇이 있었는가? 이 당시 중국과 고구려는 일대 긴장상태였으며, 그에 따라 크고 작은 갈등이 많이 일어났다. 그 중 큰 전투들을 뽑자면, 먼저 1차 여수전쟁(598)이 있으며, 배산전투(577)를 비롯한 평원왕~영양왕 초기 시기의 전쟁까지 포함될 것이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남북조시대로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북조와 고구려의 갈등 또한 자주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전투 또한 많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먼저 평원왕 시기의 전쟁들을 보자. 평원왕은 남조 진(陳)과 북조 북주(北周)의 대결을 계속 지켜보며 중국의 정세가 급변할 것을 대비해 국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아마 을지문덕도 이러한 과정에서 등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평원왕의 고구려가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던 577년, 북주의 황제인 무제 우문옹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침공한다. 이것이 배산전투의 시작이다. 배산에서 북주군과 격돌한 고구려군은 우리가 잘 아는 온달장군의 지휘 아래 대승을 거두게 된다. 어쩌면 을지문덕은 배산전투에서 온달의 부관으로 참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북주가 수로 바뀌고, 수가 남쪽의 진을 공격해 통일하면서 평원왕은 더더욱 국경 방비를 튼튼히 하고 수나라의 무기장인들을 몰래 빼돌려 와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수 문제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평원왕이 죽고 양원왕이 즉위하자, 수 문제는 아예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고구려가 요서의 임유관을 먼저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임유관을 공격했던 목적은 임유관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침공 시 거점이 될 임유관을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수서>에는 임유관을 지키던 수나라 장수 위충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고는 하나, 위충은 고구려군의 본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쓴 고구려군을 보고 고구려군이 퇴각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출병을 조양(임유관)에서 한 것이 아니라 탁군(지금의 베이징 일대) 쪽에서 한 것으로도 방증이 된다. 만일 임유관이 멀쩡했더라면 고구려와의 경계인 임유관에서 출병하는 것이 맞지, 수천 리나 떨어진 탁군에서 출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기에는 분명히 을지문덕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그는 평원왕 후기 즈음하여 등용된 듯하며, 그 당시 동북아가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그가 활약할 기회 또한 많아 저 멀리 중원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두번째 단서, 을지문덕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신(大臣)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대신은 일반적으로 고관대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 <신당서>에서는 ,
"고구려 왕은 오색 무늬의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으로 관(冠)을 만들며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둘렀다. 대신(大臣)은 푸른 비단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비단관(絳羅冠)을 썼다.”
라고 설명하였다. 즉 대신이란 왕 다음가는 유력한 신하를 나타낸다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고구려는 뿌리깊은 부족 중심 국가였다. 건국 초기부터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의 다섯 부족의 연합이었으며, 고국천왕이 이 5부를 행정적으로 개편한 뒤에도 고(高)씨, 명림(明臨)씨, 연(淵)씨, 을(乙)씨 등 씨족과 부족 중심의 인사들이 많이 나타난다. 아무리 고구려가 말갈인 등 유목민족과 더불어 산 다민족 국가였지만, 왕 다음가는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집안 배경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단서는 세 번째 단서와도 관련되는데, 그가 을씨였든 혹은 다른 성씨였든, 그가 유력귀족가문의 자제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의 중앙귀족들은 주로 어디에 거주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도성인 평양성 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의 기록은, 비록 후대에 쓰여진 것이긴 하나 신뢰가 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국계가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마리가 있는데, 바로 그가 쓴 <여수장우중문시> 때문이다. 이 시는 한시 작법에 맞추어 정확히 지어졌는데, 당시 고구려 지배층에서도 이렇게 수준급으로 한문을 구사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옛날 평양지방의 낙랑군 출신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낙랑군의 중심은 평양이었고, 낙랑군이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된 것은 313년 미천왕 대의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낙랑군 출신의 신진 세력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을지문덕이 활동하는 시기는 낙랑군의 멸망보다 300년 가까이 지난 이후이다. 만약 을지문덕 가문이 낙랑군에 살던 중국계 서민 출신이었다면, 300년이 지나면서 토착 예맥세력에 동화되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낙랑군의 지배층이었다고 해도,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알 수 있듯, 을지문덕이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면 이미 고구려인들이 한문의 사용에 어색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한문을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해도, 이미 7세기 무렵에는 수 세기 동안 중국과 교류해 오면서 한문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토착 고구려인들 중에서도 한문을 유창히 구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평민이 그렇게 자유로이 한시를 지을 리는 만무할 것이므로, 그가 태학에서 공부한 귀족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학(儒學), 문학, 무예 등을 가르쳤으므로 태학의 졸업생들이라면 거리낌없이 한문을 구사했을 것이다. 평민 대상의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에서도 유교경전과 무예를 가르쳤으나, 만약 을지문덕이 평민 출신이었다면 대신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되기 때문에 그는 태학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고구려의 중앙귀족이었다는 것은 옳은 사실로 볼 수 있다. 혹은 <자치통감>에서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尉支文德)으로 기록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을지문덕이 선비족 울지부(尉遲部) 출신의 귀화인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가 고구려의 대신이라고 기록된 점을 볼 때 상당히 지체높았던 인물로 보이는데도 그가 어느 부(部) 출신인지나 그의 출세의 과정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또 평원왕 시기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격인사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가 양광(양제)이 문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는 혼란 속에서 망명한 울지부 출신의 인물이 아니겠느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몇 가지 약점이 있는데, 우선 양제가 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것은 604년, 2차 여수전쟁이 일어난 때는 612년이다. 과연 8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순수 이방인이 고구려 사회 속에서 신뢰를 쌓아 최고 군통수권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심지어 울지부는 수나라에서도 아주 명망 높았던 귀족 가문이다. 아무리 선진국인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도 한창 수와의 분위기가 냉랭했던 시기에, 적국에서 넘어온 자에게 직접 군사를 다스리도록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출신 부를 명시하지 않았던 것 또한 당대에 그의 가문이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기에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대변되었던 것일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서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두 번째 단서와 깊게 관련돼 있는데, 그가 중앙귀족이었다는 것이 그의 성씨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자치통감>에서는 을지씨에 대해 '동이의 복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정식 사서에 있는 을지씨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을지씨의 한자를 통해 그의 성씨를 추정해 갈 수 있다. 乙支에서 乙이라는 글자는 삼국의 인명, 지명에서 우물을 뜻하는 단어이다.(예: 蘿井=奈乙, 伊干=乙粲) 그러므로 그가 귀화인이라는 추측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돈씨가보>와 평양 지방의 구전 전승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 돈씨가보에서는 을지씨의 본래 성이 고구려의 명문인 을씨라 했고, 평양 지방의 구전 역시 을지문덕의 조상이 진대법을 시행했던 명재상 을파소라고 지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되지 않는 점은, 을씨가 왜 을지문덕 대에 이르러 을지씨가 되었는가 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을지씨의 한자를 봐야 한다. 을지를 한자로 쓰면 乙支. 여기서 이 支는 고대 한국의 존칭 접미사로써, '臣智', '都設智', '武力智' 등등에 사용되었던 智, '波珍干岐', '旱岐' 등에서 나타나는 岐와 같은 의미인데, 모두 '치'로 발음되었다. 앞서 말했듯 대신의 지위에는 아무나 오를 수 없었다. 귀족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뛰어난 과업 수행 능력과 인망이 받쳐줘야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을씨는 고국천왕 대에 을파소가 국상이 된 후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을파소가 고국천왕 대의 사람이니, 을지문덕은 거의 300년 만에 을씨 가문을 다시 재상지종으로 만든,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자, 외국의 113만 침략군을 막아낸 구국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그의 성에 존칭접미사 支를 붙여 '을지'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시간이 지나며 아예 그것이 성씨로 굳어졌을 수도 있다. 즉 을지씨가 곧 을씨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설로는 을지가 성씨가 아니라, 음운상의 유사성을 들어 고구려의 제3관등인 울절(鬱折)의 다른표기가 아닐까라고 추측하는 가설도 있다. 이것은 을지문덕이 대신이었다는 삼국사기의 서술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乙支와 鬱折이 당대에 얼마나 유사한 발음이었는가는 모르는 일이다. 또한 목천돈씨의 가승에 대해 일부는, 숭조사업으로 오염된 족보의 기록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더욱이 묘청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던 을지수, 을지달, 을지원 삼형제의 이름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정식 사료에 남아있지 않아 그 신뢰성을 의심받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돈씨의 연원에 대해, 고려 태조가 통일을 위해 후백제와 경쟁하던 시기,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태조에게 완강히 저항하여 이에 노한 태조가 그 지방을 복속시키고 그들의 본래 성인 尙, 于, 張, 頓 등의 성을 각각 象(코끼리), 牛(소), 獐(노루), 豚(돼지)로 개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돈씨의 연원이 문헌마다 다르게 기술된 까닭에 돈씨가보의 기록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역시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당대의 기록(조선시대에 편찬되긴 했으나 당대사료인 <고려실록>을 보고 편찬했으므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목천지방에서 그토록 완강했던 저항이 있었다면, 어째서 후백제군의 인물들 중 우씨나 장씨, 돈씨 등이 나타나지 않는가? 후백제 측 장수 중 상애(尙哀), 상달(尙疸) 등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우씨, 돈씨, 장씨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의 성들 중 목천 상씨문중 외에는 자신 가문의 내력에 대해 본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에 저항하다 동물을 의미하는 성(畜姓)으로 개성 당했다고 기록한 족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목천 상씨 문중에서 최초로 펴낸 족보인 <목천상씨부여파보>는 1930년 간행된 것으로써, 오히려 상씨문중의 족보가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견해로는, 백제의 귀족가문이었던 목천 마씨가 한자로 馬를 썼기 때문에 생긴 민간전승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1934년 잡지 <별건곤>에 연재된 <을지문덕 묘 참배기>에는 을지문덕의 묘가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을지문덕의 묘가 있으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쓰여 있다. 또한 1935년 10월 1일~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준연의 답사기'에는 역시 을지문덕 묘의 위치를 평남 강서군 잉차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있다고 기록하며 돈씨 문중의 일원인 '돈종각(頓宗珏) 씨'도 만났다고 한다. 돈종각 씨는 본래 평남 대동군 대보면 대평외리에 살았는데, 자신의 조상인 을지문덕 장군의 묘가 평북 의주에 있다고 하여 가보니 그곳은 을파소의 무덤이었고, 을파소의 조부인 을두지의 묘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호에는 '조만식, 최윤옥, 김병연, 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하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평양시 평남선 대평역 근방에 '을지묘'라고 전해지는 큰 고분이 있고, 이 인근에 돈뫼(頓山)라고 하는 동네가 있어 돈씨 가문 사람들이 30~40여 호 살고 있다고 한다. 대평역과 대동군 대평외리는 바로 인접한 이웃동네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돈씨 가문이 자신들이 을지문덕의 후손이라 여기게 된 것은 최소 19세기 이전으로 보인다. 또 하나 <돈씨가보>의 신빙성을 높여 주는 것은, 돈씨 문중이 굳이 그들의 조상을 을씨라고 기록한 것이다. 돈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상계를 '을씨->을지씨->(돈산에 봉해짐)돈씨' 로 기록하고 있는데, 솔직히 직관적이지 않다. 보통 숭조사업은 자신들의 성과 비슷한 성을 가지고, 자기네 선조들과 행적이 비슷한 사람을 먼 조상으로 끼워 맞추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김씨 왕실도 자신들의 선조를 소호금천(少昊金天),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로 끌어다 맞춘 사례가 있다. 그런데 돈씨의 경우는 한나라 때의 유명한 효자인 돈기(頓琦) 등이 있는데도 굳이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족보에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들이 <돈씨가보>의 기록을 한층 더 믿음직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론을 정리하자면,
1. 그는 평원왕 시기 대중국 국방의 강화로 등용되었다. 임유관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2. 그는 유력 가문 출신으로, 평양성 출신이다. 울절의 벼슬을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
3. 그는 토착 고구려계 을씨 가문 출신이며, 후손은 돈씨이다.
많은 사료들을 참고해 봐도, 을지문덕의 출신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한스럽다. 앞으로 더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어 조금이나마 더 그의 출신을 짐작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덧글
http://qindex.info/i.php?x=5894
의주는 요동과 낙랑을 잇는 통로에 있는데 맥고려가 그곳에 을파소의 무덤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http://qindex.info/i.php?x=7414
족보의 이야기로 채워서는 안됩니다.
왕씨고려의 왕가는 당나라 황제의 후손을 자처했습니다.
http://qindex.info/i.php?x=41573
삼국사기 조차 사료비판을 통해 걸러 읽어야 합니다.
http://qindex.info/i.php?x=11885
족보는 더 말할 나위가 없죠.
http://qindex.info/i.php?x=3484
고려를 치려는 수나라 군대는 임유관을 통해 나갔다는 것이고요.
고려가 임유관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출정은 황제가 참관할 수 있는 곳에서 할 것이고요.
기록에는 577년에 고려가 조공을 하자 북주가 평원왕에게 요동군공 요동왕이라는 작위를 내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http://qindex.info/i.php?x=591
http://qindex.info/i.php?x=17702
http://qindex.info/i.php?x=17702
명석포 이야기는 여기에...
http://qindex.info/i.php?x=14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