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설화는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졸본으로 도망쳐 온 주몽은 졸본 지역 세력가의 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둔다. 그러나 얼마 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이인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잇게 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부아악(지금의 서울 북한산)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온조는 지금의 풍납토성 자리인 위례성에, 비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미추홀은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그곳의 배성들은 하나 둘씩 비류의 나라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비류는 한탄만 하다가 죽게된다. 그러자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은 온조의 나라로 갔고, 온조는 이에 기뻐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따라왔다'라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백제(百濟)'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제일 널리 알려진 백제의 건국설화이나, 이외에도 다른 버전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비류시조전승과 구태시조전승이다.
먼저 비류시조 전승의 내용을 살펴보자.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 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이 그저 군더더기 살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여기서는 온조시조 전승과 대강 비슷한 구조를 보이나 한 가지 차이는 고구려에서의 탈출과 백제의 건국이 비류가 주도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구태시조 전승을 보자.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은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이 설화는 앞선 온조시조 전승이나 비류시조 전승과는 전혀 결을 달리 하는데, 제 3의 인물인 구태가 등장하여 그가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세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온조시조 전승과 비류시조 전승을 보자. 둘의 기본적인 구조는 매우 유사하다. 단지 비류시조 전승이 온조, 비류 형제의 외가인 졸본부여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두 신화는 본디 한 형태의 신화였으리라 추측되며, 그것이 전승되었던 두 별개의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다른 형태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해관계의 충돌에 의해 신화가 변질되었을까? 먼저 온조시조 전승은 비류, 온조 형제를 주몽의 친아들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조가 건국한 백제는 말하자면 고구려의 자손 국가가 되는 것이며 자연히 고구려와 부여의 연관성이 강조된다. 이에 반해 비류시조 전승은 온조와 비류를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우태의 아들로 설정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연관 관계가 옅어졌다. 그리고 구태 전승으로 가면 설화에 고구려 관련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시조의 상계를 부여와 연결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설화의 선후관계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조금만 심도 있게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전혀 좋지 않았음을 잘 알 것이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백제의 맹렬한 공격에 남평양에서 전사했고, 이후 백제 개로왕이 북위 황제에게 올린 표문을 보면 고구려를 사나운 이리, 뱀, 흉악한 무리 등에 비유하며 대놓고 비난하는 모습이 보인다. 백제는 고국원왕이 전사한 이후 늘 고구려와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무덤 양식, 유물 등으로 보았을 때 백제는 고구려와 매우 유사한 점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적석총이다. 그러므로 시조가 비류이냐 온조이냐 아니면 구태이냐를 떠나서 백제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영향을 매우 깊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는 태생적으로 고구려와 대립할 때 고구려에서 나온 국가라는 약점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백제 왕실은 늘 자신의 상계를 부여와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 등의 백제계 도래인 가문의 설명을 보면 시조를 온조왕이나 비류왕이라 하지 않고 도모대왕, 즉 주몽이라고 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같음을 내세워 고구려와 백제가 대등하다는 것을 피력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성을 부여로 삼은 것과 이후 성왕 대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던 일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삼국사기 초기의 백제 관련한 엉터리 기년 또한 백제에서 그들의 역사를 고구려와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연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으로 보았을 때, 초기 백제의 문화가 고구려와 매우 깊은 유사성을 보이는데 반해 부여와는 그다지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결국 백제에서 자신들의 상계를 부여로 연결시키려던 시도들은 다분히 관념적인 사관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대등한 입지를 가지기 위해 고구려의 직계 조상인 부여와 자신들의 연관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와 빈번히 교류했던 남조에 파견된 백제 사신들도 국가의 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가 마치 부여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이 상태에서 구태 전승을 보자. 위의 기사는 <북사>의 것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구태는 동명의 후손이라고 되어있다. 당연히 여기서 동명은 고구려의 동명성왕 추모가 아니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이다. 동명왕 설화는 후대의 주몽 설화와 놀랍도록 유사한데,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부여의 건국설화를 주몽의 설화에 끌어오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변형되기 전의 주몽 설화는 위의 비류 전승의 앞 부분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부여의 시조인 동명의 '후손'이라는 표현과 위 비류 전승의 '해부루왕의 서손'이라는 표현, 상당히 유사한 표현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와의 친연관계가 비교적 강조된 온조 전승이 비류 전승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이 지나며 선조의 상계 뿐만 아니라 시조 자체가 바뀐 전승이 등장하였는가? 그것은 백제 왕계의 미스터리인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제의 왕계는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초고왕 으로 이어진 뒤 초고왕의 아들인 구수왕, 손자인 사반왕을 거쳐 뜬금없이 초고왕의 동생이라 전하는 고이왕에게로 넘어간다. 삼국사기를 보면 사반왕이 어려 정무 수행 능력이 없어 고이왕이 그를 밀어내고 대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형이 즉위하고 조카가 즉위한 다음 조카손자가 즉위한 다음에야 왕이 되었다면 못해도 예순은 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이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52년에 달한다. 더욱이 아버지인 개루왕은 166년에 사망한 상황. 즉 고이왕이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해도 사반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던 시점에서 그는 68세이다. 그렇다면 120살에서야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고대인의 수명을 고려해 보았을 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초고왕의 조카로 보기도 하지만 고이왕이 초고왕의 조카라고 딱 잘라 명시된 문헌은 없다. 그래서 고이왕을 초고왕계와는 전혀 다른 왕가로 보기도 하는데, 그 증거로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 의 이른바 고이왕계 왕통 시기에 갑자기 이름에 우(優)가 붙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중 명확하게 고이왕의 동생이라고 명시된 달솔 우영(優永), 역시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비류왕의 서제(庶弟)인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이다. 이들은 이들 네 왕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다 이후 싹 사라진다. 이 때문에 이들을 우(優)씨로 파악해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아예 다른 왕통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 고이왕계의 시조를 위에 등장한 우태(優台)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다시 비류 시조 전승을 보자.
여기서 비류가 온조를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류는 왜 온조를 설득했을까? 만약 주몽이 비류 온조 형제의 의붓아버지였다면 비류는 굳이 온조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을 태자로 삼아주지도 않는 의붓아버지를 떠나 어머니를 모시고 가자는데 반대하는 동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온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고구려에 친밀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비류가 온조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이러한 설득을 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 친밀감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이 때문에 이후 초고왕계 왕통은 고구려와 관련성이 깊은 온조 전승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비류는 고구려라는 나라와 의붓아버지 주몽에게 미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미지의 남쪽으로 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이왕계의 상계를 우태-비류 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초고왕계는 '주몽-온조-다루-기루-개루...'로, 고이왕계는 '우태-비류...고이왕-책계왕...'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있다. 비류와 온조가 입장이 달랐다고는 해도 둘은 형제였다. 그런데 왜 이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그렇게 대립하게 된 것일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제왕운기>에 나오는 백제 건국 부분을 보자.
"백제의 시조의 이름은 온조(溫祚)이니, 동명성제(東明聖帝)가 그 아버지였으며, 그 형 유리(類利)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아 남쪽으로 건너갔도다. 동모(同母) 형 은조(殷祚)와 함께 남쪽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웠는데, 은조는 왕위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죽었다."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다르게 비류는 은조로 등장한다. 즉 비류가 온조의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써, 초고왕계의 설화로 보여진다. 여기서도 비류가 왕이 된 점은 같으나, 온조와 비류가 독립된 두 개의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라 비류가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일찍 죽어 온조가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이 기록을 한 번 보자.
"13년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위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기서 늙은 할미라 함은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를 의미한다. 그런데 남자로 둔갑했다니? 소서노가 홍길동처럼 도술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이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저술 방식에 유의하며 해석할 필요가 있다.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신하가 주군을 시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불미스럽고 좋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여러 반란과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자연재해나 자연의 신비한 조화 등으로 많이 치환하여 기술하였다. 유교에서는 군주의 실정(失政) 등 나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혜성, 가뭄, 우박 등의 기상 이변이 나타난다고 보았으므로 김부식은 삼국사기 안에 여러 은유를 숨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위 기사를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면, '둔갑했다'라는 표현은 당사자인 왕실의 입장은 아니다. 주변의 관찰자, 즉 민초의 시선이다. 흔히 말하는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라는 이야기처럼, 백제의 백성들에 있어서 위 기사를 통해 기록된 사건은 '둔갑했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5마리의 호랑이. 진짜 호랑이가 궐 안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도 적어 천문 현상으로 지면을 때워야 했던 초기 삼국사기 기사에 정말 이런 사소한 사건을 실었을까? 설사 정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라 해도 1000년 뒤의 사람인 김부식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면 당시 백제인들에게 이 사건이 크나큰 충격이었음을 방증한다 할 수 있겠다. 이런 두 점을 염두해 두고 사건을 재구성해보자.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할머니가 남자로 둔갑해 있었다는 것은 어느 순간 지배자가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삼국사기에서 신이한 현상들은 대개 불미스러운 일을 상징한다. 따라서 궐 안에 맹수인 호랑이가 다섯 마리나 들어왔다는 것은 무언가 큰 사건의 은유이다. 그렇다면 그 큰 사건은 무엇인가? 위 기사는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내용 바로 뒤에 소서노의 죽음이 나온다. 따라서 소서노의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랑이의 얘기 역시 단순한 맹수의 침입이 아니라,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어떠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수도였던 위례성(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집단이라면, 동예가 가장 대표적이다. 백제 초기 기사에서 많이 나타나는 말갈과의 전투 또한 진짜 말갈족이 아니라 예족 집단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섯 마리의 호랑이라는 것은 다섯 집단의 예족 군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부터는 다소 필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있다. 비류는 동생 온조보다 고구려를 떠날 더 강한 동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온조를 설득해 졸본의 세력가였던 어머니를 모시고 한강까지 내려와 후일 백제의 원형이 되는 공동체를 세웠을 것이다. 소서노의 집안은 세력가 집안이었으므로 많은 사람과 자본이 그녀를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공동체의 권력은 소서노에게로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여성이 정치지도자로서 나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소서노는 수렴청정 정도를 하며 명목상의 권좌는 두 아들 중 하나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온조와 비류 중 누구에게 그 자리를 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남쪽으로 가자고 강변했던 비류에게 자리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비류는 모계인 소서노 쪽에 친근감이 더 강했고, 온조는 그 반대였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첫째아들 비류와 공동으로 나라를 경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온조는 이에 불만을 품고 나라 바깥쪽에 사는 예족 군대를 끌어들여 왕궁을 접수했다. 그때문에 '하루아침에' 권좌에 있던 늙은 할미, 소서노는 쫓겨났(혹은 죽었을 수도)으며 온조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류 역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 혹은 친척은 살아남았을 수도 있는데, 바로 이들이 이후 등장하는 우씨세력의 근간이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온조에게 밀려난 비류세력은 온조세력을 뒤엎을 반전의 기회를 노렸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서노의 전남편인 우태의 존재를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그를 부여의 해부루왕 서손이라고 하여 그들이 주몽에게서 갈라져 나온 온조세력보다 우위임을 선전하려 했다.(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만 같은 이부형제라는 추측도 있지만 여러 사료에 둘의 관계는 동모형제라고 나오므로 필자는 그 견해를 따르겠다) 반대로 온조세력 역시 비류의 죽음이 초기 정착지를 잘못 택한, 군주로서의 자질 미달이 원인이었으며, 이후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온조에게 귀순해 왔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본격적으로 고이왕계와 초고왕계가 대립하게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신화와 전혀 결이 다른 구태 전승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실 이것은 비류 시조 설화와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비류 전승에서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이다. 음운상으로 보았을 때 우태는 구태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구태의 행적을 파악한다면 베일에 싸인 우태의 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구태는 위의 기록 말고 다른 기록에 등장하는가? 위 북사의 기록에서 미사여구를 빼고 남는 구태의 행적은 두가지이다. 바로 "요동태수 공손탁의 딸과 결혼했다."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이 중 공손탁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구태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공손탁(公孫度)은 공손도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는 원래 현도군의 하급관리였지만 그 유명한 중영 동탁의 도움을 통해 요동태수가 된다. 이후 고구려, 오환(흉노의 동쪽에 살던 동호의 일파)과 대립하기도 한 인물인데, 그는 자기 일가의 딸을 부여의 위구태왕(尉仇台)에게 시집보낸다. 이 때에 고구려는 대략 고국천왕 시기로, 국력이 크게 성할 때였다. 더군다나 선비족도 강성해져 부여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를 느끼고 요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공손씨와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공손도와 혼인관계를 맺었던 인물은 이 위구태왕이 유일하다. 게다가 위구태와 구태는 위(尉) 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구태라는 발음은 한자까지 동일하다. 이 위(尉) 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6대 대조대왕(大祖大王) 궁(宮)이 낳자마자 눈을 떠서 능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증손(曾孫)인 산상왕(山上王)도 또한 낳자마자 눈을 떠서 사람을 봄이 그 증조와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位)라 하므로 '위궁'이라 하였다."
위 삼국사기의 기사처럼 고구려어에서는 접두사 위(位)가 서로 닮음을 표시하는 단어였다.
위구태왕의 위(尉)의 상고한어 발음은 [ɣĭwəi]였고, 위(位)의 발음은 [Ǿĭwəi]이다(왕리 체계에 의거).
위와 같이 발음이 비슷한 것을 통해서 "尉=位"라고 가정한다면 위구태왕의 휘는 '구태와 닮음'이 되겠다.
"13년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위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여기서 늙은 할미라 함은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를 의미한다. 그런데 남자로 둔갑했다니? 소서노가 홍길동처럼 도술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이것은 삼국사기 특유의 저술 방식에 유의하며 해석할 필요가 있다.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신하가 주군을 시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불미스럽고 좋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여러 반란과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자연재해나 자연의 신비한 조화 등으로 많이 치환하여 기술하였다. 유교에서는 군주의 실정(失政) 등 나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혜성, 가뭄, 우박 등의 기상 이변이 나타난다고 보았으므로 김부식은 삼국사기 안에 여러 은유를 숨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위 기사를 생각해 보자.
생각해 보면, '둔갑했다'라는 표현은 당사자인 왕실의 입장은 아니다. 주변의 관찰자, 즉 민초의 시선이다. 흔히 말하는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라는 이야기처럼, 백제의 백성들에 있어서 위 기사를 통해 기록된 사건은 '둔갑했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기이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5마리의 호랑이. 진짜 호랑이가 궐 안에 들어왔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도 적어 천문 현상으로 지면을 때워야 했던 초기 삼국사기 기사에 정말 이런 사소한 사건을 실었을까? 설사 정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라 해도 1000년 뒤의 사람인 김부식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면 당시 백제인들에게 이 사건이 크나큰 충격이었음을 방증한다 할 수 있겠다. 이런 두 점을 염두해 두고 사건을 재구성해보자.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할머니가 남자로 둔갑해 있었다는 것은 어느 순간 지배자가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삼국사기에서 신이한 현상들은 대개 불미스러운 일을 상징한다. 따라서 궐 안에 맹수인 호랑이가 다섯 마리나 들어왔다는 것은 무언가 큰 사건의 은유이다. 그렇다면 그 큰 사건은 무엇인가? 위 기사는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내용 바로 뒤에 소서노의 죽음이 나온다. 따라서 소서노의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랑이의 얘기 역시 단순한 맹수의 침입이 아니라,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어떠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수도였던 위례성(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집단이라면, 동예가 가장 대표적이다. 백제 초기 기사에서 많이 나타나는 말갈과의 전투 또한 진짜 말갈족이 아니라 예족 집단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섯 마리의 호랑이라는 것은 다섯 집단의 예족 군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부터는 다소 필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있다. 비류는 동생 온조보다 고구려를 떠날 더 강한 동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온조를 설득해 졸본의 세력가였던 어머니를 모시고 한강까지 내려와 후일 백제의 원형이 되는 공동체를 세웠을 것이다. 소서노의 집안은 세력가 집안이었으므로 많은 사람과 자본이 그녀를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공동체의 권력은 소서노에게로 집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여성이 정치지도자로서 나설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소서노는 수렴청정 정도를 하며 명목상의 권좌는 두 아들 중 하나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온조와 비류 중 누구에게 그 자리를 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남쪽으로 가자고 강변했던 비류에게 자리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비류는 모계인 소서노 쪽에 친근감이 더 강했고, 온조는 그 반대였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첫째아들 비류와 공동으로 나라를 경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온조는 이에 불만을 품고 나라 바깥쪽에 사는 예족 군대를 끌어들여 왕궁을 접수했다. 그때문에 '하루아침에' 권좌에 있던 늙은 할미, 소서노는 쫓겨났(혹은 죽었을 수도)으며 온조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류 역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 혹은 친척은 살아남았을 수도 있는데, 바로 이들이 이후 등장하는 우씨세력의 근간이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온조에게 밀려난 비류세력은 온조세력을 뒤엎을 반전의 기회를 노렸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서노의 전남편인 우태의 존재를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그를 부여의 해부루왕 서손이라고 하여 그들이 주몽에게서 갈라져 나온 온조세력보다 우위임을 선전하려 했다.(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만 같은 이부형제라는 추측도 있지만 여러 사료에 둘의 관계는 동모형제라고 나오므로 필자는 그 견해를 따르겠다) 반대로 온조세력 역시 비류의 죽음이 초기 정착지를 잘못 택한, 군주로서의 자질 미달이 원인이었으며, 이후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온조에게 귀순해 왔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리하여 본격적으로 고이왕계와 초고왕계가 대립하게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두 신화와 전혀 결이 다른 구태 전승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실 이것은 비류 시조 설화와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비류 전승에서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이다. 음운상으로 보았을 때 우태는 구태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구태의 행적을 파악한다면 베일에 싸인 우태의 정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구태는 위의 기록 말고 다른 기록에 등장하는가? 위 북사의 기록에서 미사여구를 빼고 남는 구태의 행적은 두가지이다. 바로 "요동태수 공손탁의 딸과 결혼했다."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이 중 공손탁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구태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 공손탁(公孫度)은 공손도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는 원래 현도군의 하급관리였지만 그 유명한 중영 동탁의 도움을 통해 요동태수가 된다. 이후 고구려, 오환(흉노의 동쪽에 살던 동호의 일파)과 대립하기도 한 인물인데, 그는 자기 일가의 딸을 부여의 위구태왕(尉仇台)에게 시집보낸다. 이 때에 고구려는 대략 고국천왕 시기로, 국력이 크게 성할 때였다. 더군다나 선비족도 강성해져 부여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를 느끼고 요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공손씨와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공손도와 혼인관계를 맺었던 인물은 이 위구태왕이 유일하다. 게다가 위구태와 구태는 위(尉) 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구태라는 발음은 한자까지 동일하다. 이 위(尉) 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6대 대조대왕(大祖大王) 궁(宮)이 낳자마자 눈을 떠서 능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증손(曾孫)인 산상왕(山上王)도 또한 낳자마자 눈을 떠서 사람을 봄이 그 증조와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位)라 하므로 '위궁'이라 하였다."
위 삼국사기의 기사처럼 고구려어에서는 접두사 위(位)가 서로 닮음을 표시하는 단어였다.
위구태왕의 위(尉)의 상고한어 발음은 [ɣĭwəi]였고, 위(位)의 발음은 [Ǿĭwəi]이다(왕리 체계에 의거).
위와 같이 발음이 비슷한 것을 통해서 "尉=位"라고 가정한다면 위구태왕의 휘는 '구태와 닮음'이 되겠다.
위구태왕은 무려 1500년 뒤의 이승휴에게도 알려졌는데, 그 기록을 보자.
"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갈 때, 요동의 바닷가 길 옆에 이르렀는데, 묘가 세워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여의 부마대왕(駙馬大王)의 묘이다.”라고 하였다."
위 기록은 <제왕운기>의 주석 중 일부분이다. 이렇듯 위구태왕은 1000년이 지나서도 요동태수 공손도 집안에게 장가 든 때문에 부마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여의 군왕 중에서 유명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백제는 중국에 은연 중에 자신들이 부여사람 우태의 후손이라 이야기하며 우태의 행적을 위구태왕의 행적으로 덧입혀 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백제의 건국자로서의 면모와 위구태왕의 면모가 혼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보여진다. 결국 이 과정에서 시조의 이름마저 위구태와 우태가 뒤섞인 구태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보자. 대방(帶方)이라는 것은 대방군(帶方郡)을 이야기한다고 보여진다. 대방군은 한나라가 한 사군 중 낙랑군의 일부를 떼어내어 설치한 군으로 대략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온조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에 자리를 잡았고, 비류는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구태의 원형이 된 우태와 위구태 역시 부여 사람이므로 황해도까지는 오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중국인들이 온조가 나라를 세운 한강 남부까지 대방군으로 뭉뚱그려 기록한 것이라며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조금 더 합리적인 설명을 해 볼까 한다.
고이왕계 왕들 중 한 명으로 지목되는 책계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와 혼인했다. 여기서 대방왕은 대방태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286년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침공당하자 책계왕은 대방으로 군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다. 필자는 이 사실이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한원>의 기록을 보자.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중략)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길, 백제는 성에 그 조상 구태묘를 세우고 사계절에 제사를 지낸다."
위의 기록처럼 백제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시조를 구태라고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구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낙랑, 대방군의 권위를 빌려오려 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즉 초고왕계에게 명분과 군사력에서 밀렸던 고이왕계는 그들이 시조로 삼은 고구려보다 더 상계인 부여와, 당시 문화 선진국이었던 대방의 권위를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세 가지의 다른 설화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 보면, 삼국사기에서 주(註)로 달지 않고 정설로 기록한 온조의 시조기사가 백제 역사의 주류를 차지했던 초고왕계의 사관(史觀)이며, 비류가 시조로 설정된 설화는 초고왕계를 상대로 역전을 시도했던 고이왕계의 몸부림, 구태 시조설화는 백제가 그들 600년 역사 전체적으로 적대했던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대외정책 내지 국시로 볼 수 있겠다.
"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갈 때, 요동의 바닷가 길 옆에 이르렀는데, 묘가 세워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여의 부마대왕(駙馬大王)의 묘이다.”라고 하였다."
위 기록은 <제왕운기>의 주석 중 일부분이다. 이렇듯 위구태왕은 1000년이 지나서도 요동태수 공손도 집안에게 장가 든 때문에 부마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여의 군왕 중에서 유명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백제는 중국에 은연 중에 자신들이 부여사람 우태의 후손이라 이야기하며 우태의 행적을 위구태왕의 행적으로 덧입혀 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백제의 건국자로서의 면모와 위구태왕의 면모가 혼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보여진다. 결국 이 과정에서 시조의 이름마저 위구태와 우태가 뒤섞인 구태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보자. 대방(帶方)이라는 것은 대방군(帶方郡)을 이야기한다고 보여진다. 대방군은 한나라가 한 사군 중 낙랑군의 일부를 떼어내어 설치한 군으로 대략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온조는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에 자리를 잡았고, 비류는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구태의 원형이 된 우태와 위구태 역시 부여 사람이므로 황해도까지는 오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중국인들이 온조가 나라를 세운 한강 남부까지 대방군으로 뭉뚱그려 기록한 것이라며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조금 더 합리적인 설명을 해 볼까 한다.
고이왕계 왕들 중 한 명으로 지목되는 책계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와 혼인했다. 여기서 대방왕은 대방태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286년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침공당하자 책계왕은 대방으로 군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를 물리쳤다. 필자는 이 사실이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한원>의 기록을 보자.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중략)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길, 백제는 성에 그 조상 구태묘를 세우고 사계절에 제사를 지낸다."
위의 기록처럼 백제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시조를 구태라고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구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낙랑, 대방군의 권위를 빌려오려 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즉 초고왕계에게 명분과 군사력에서 밀렸던 고이왕계는 그들이 시조로 삼은 고구려보다 더 상계인 부여와, 당시 문화 선진국이었던 대방의 권위를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세 가지의 다른 설화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 보면, 삼국사기에서 주(註)로 달지 않고 정설로 기록한 온조의 시조기사가 백제 역사의 주류를 차지했던 초고왕계의 사관(史觀)이며, 비류가 시조로 설정된 설화는 초고왕계를 상대로 역전을 시도했던 고이왕계의 몸부림, 구태 시조설화는 백제가 그들 600년 역사 전체적으로 적대했던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대외정책 내지 국시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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